하회 마을

하회 마을 북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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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 마을 약도 [크게 보기]

북촌댁을 나와서 마을의 중앙길을 따라 강가로 향하면 길 양쪽으로 삼신당 신목, 양진당, 충효당, 작천고택이 나온다.

북촌댁을 나와서 마을의 중앙길로 간다.

가는 길 중간에 작은 골목이 나온다. 삼신당 신목으로 가는 길이다.

이 골목으로 들어간다. 왼쪽과 오른쪽의 담장 모양이 다르다. 왼쪽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한 토석담이다. 오른쪽은 흙을 사용한 토담(판담)이라고 한다. 토담은 먼저 달구로 담터를 닦는다. 그 후 산에서 가져온 큰 돌을 세운 뒤 다시 달구질 한다. 거푸집처럼 양쪽에 나무판을 대어 틀을 만든 뒤 그 사이에 짚, 진흙 등을 넣어 발로 다진 다음 굳으면 판을 떼어내어 만든다. 판을 떼어 낼때 판 경계선이 남아 판담이라고도 한다. 비가 오면 흙이 쓸려 내려 갈 수 있으므로 담장 위에 기와 지붕을 이었다.

하회 마을은 예전부터 우물을 파지 않고 돌담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상 행주형(배 떠나는 모양)이라 우물은 배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고 돌담을 쌓으면 배를 물에 가라앉히는 형국이 된다 하여 돌담 대신 흙담을 쌓았다는 것이다. 돌담보다 쌓는 과정과 사후 관리가 번거로운 토담을 쌓은 이유에 대해 모래사장이 많은 강가에 위치한 하회 마을에서는 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삼신당 신목. 수령이 600년 된 느티나무이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고 또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나, 예전에는 개방된 상태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양반마을의 경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동제, 별신굿 등을 부정하는 곳이 많다. 하회 마을은 동제와 양반을 풍자하는 별신굿탈놀이를 전승 보전해왔다. 또한 동신을 모시는 당이 5개나 될 정도로 많다. 화산 중턱의 하회탈 전설의 서낭당, 화산 자락의 국사당(국신당), 마을에서 가장 높고 중심에 위치한 수령이 6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는 삼신당이 중요하다.

동제는 정월 대보름과 4월 초파일에 올린다. 초파일에 동제를 올리는 것은 드문 일로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시대 전통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매년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서낭당에서 동신을 모셔와 마을의 신이 깃들여 있는 삼신당에서 제사를 올린다. 별신굿은 10년에 한번씩 하는 대제(큰 동제)였다. 삼신당 신목은 마을 사람들의 출산과 아기의 성장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 느티나무는 풍산류씨 입향시조인 류종혜가 하회 마을에 들어 올 때 심었다고 전해진다.

나무 주위로 둥글게 쳐진 새끼줄에 종이 쪽지들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소원을 적어서 매 단 것들이다. 휴지통 옆에 초가 지붕 밑에 종이와 색연필이 준비되어 있다.

양진당. 하회 마을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풍산 류씨 대종택이다. 입향 시조인 류종혜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자 류성룡의 아버지인 류중영과 형인 류운룡의 집이었다. 1600년대의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다.

양진당의 거릿마당과 솟을대문. 정남향의 집으로 현재 54칸이 남아있다.

고택의 사랑채로 양진당이 당호이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의 아호에서 비롯되었다. 입암고택이라고 적힌 현판은 최동진이 쓴 글씨이다. 입암 류중영(류성룡의 아버지)의 고택이란 뜻으로 사랑채의 원 이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은 축대 위에 세웠다. 대청이 6칸으로 큰 규모에 속한다. 쪽마루와 난간을 돌려 누각처럼 보인다. 왼쪽에 겨울을 위한 온돌방과 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보인다. 대청 밑으로 건물이 축대 위로 떠 있는 상태이다. 양청형 건물이라고 하여 시원한 여름을 위해 마루 아래로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작은 일간문은 가묘로 들어가는 문이다. 양진당에는 사당이 두 채 있다. 보통 가묘는 4대째 조상의 위패만 모신다. 그 위의 조상은 모셔내어 오는데 이를 천위라고 한다. 영구히 모셔내지 않는 위패를 불천위라고 하고 그 분들을 위해 불천위 사당을 따로 짓기도 한다. 불천위 제사는 학문이 탁월한 대학자나 충신에게 왕이 내리거나 유림에서 추대해서 인정된 사람에게만 지낼 수 있다. 이 집 종택에서는 류중영과 아들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신다. 부자를 한 사당에 모실 수 없다고 하여 별묘로 모신다. 둘째 아들인 류성룡은 작은 종택인 충효당에 모셨다. 하회 마을 류씨 문중에서는 불천위가 다섯분이다.

양진당의 사랑채에서 바라본 행랑채와 대문이다. 높은 축대 위에 지어서 시야가 시원하다. 왼쪽에 마구간이 있다. 여물통이 세개 있다. 하나는 손님이 타고 오신 말을 먹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양진당을 나와서 충효당 가는 길. 양진당 맞은 편에 있다.

충효당 담장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기념식수가 있고, 뒤쪽에 화장실이 있다.

충효당 앞 구상 나무.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이 하회 마을을 방문한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이다. 2001년 가을에 관리 소홀로 나무가 죽었다. 지금의 나무는 안동시가 다시 이식한 나무이다.

구상나무는 한국 고유의 수종으로 소나무과에 속한다.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등에 자생한다. 구상나무의 열매는 원통형이며 좋은 향기가 난다. 솔방울의 빛깔에 따라 푸른구상, 검은구상, 붉은구상으로 구분된다. 이 구상나무가 서양으로 가서 성탄절의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되게 되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할 때 구상나무에 옷을 걸어 놓았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충효당의 솟을대문과 긴 행랑채. 행랑채는 류성룡의 8대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가 되면서 군사를 맞이하기 위해 독립 건물로 나중에 지었다. 양진당과 달리 집의 방향이 화천과 원지산을 볼 수 있도록 서향이다.

대문채를 지나면 바로 사랑채의 대청이다. 사랑채의 충효당이라는 편액은 명필 허목의 작품이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은 벼슬에서 물러나 농환재에서 검소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다. 충효당은 그의 학덕과 업적을 흠모하는 문하생과 손자 류원지가 사랑채와 안채를 지었다. 류성룡의 유훈이 나라에 충성하라 였다. 이에 충효당이라 이름 지었다. 처음에는 단출하였는데, 류성룡의 증손자인 류의하가 확장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충효당의 사랑채. 난간이 달린 툇마루를 달았다. 화살표는 유물전시관(영모각) 가는 길이다.

영모각은 류성룡의 유물 전시관이다. 충효당 고택 뒷쪽에 있다. 문화재관리청에서 1966년 준공하였으나, 협소하여 1975년 다시 지었다. 징비록, 류성룡 종손가 문적, 류성룡 종손가 유물 등 각종 유물과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 영모각은 죽을때까지 어버이를 잊지 않겠다는 영모록이라는 책에서 이름을 지었다. 현판은 개관식때 박정희 대통령이 써서 보낸 것이다.

[입장료] 없음

[여는 시간 (입장 마감 시간)] 하회 마을 입장시간과 동일하다.

[닫는 날] 없음

작천고택.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당시 명칭은 하회류씨 주가옥이었으나, 작천 류도관이 문경 작천리에서 이사하여 작천댁이라 불려지고 있었다. 현재 하회 작천고택으로 지정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건축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작은 집이면서도 안방과 사랑방을 구별하도록 앞쪽에 내외담을 만들었다. 담 하나로 사랑방 손님과 안방의 부녀자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민속놀이마당과 빈연정사.

빈연정사 입구.

빈연정사. 겸암 류운룡이 선조 16년(1583)에 세워 서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화천과 부용대, 겸암정사를 볼 수 있도록 북향으로 지었다. 빈연이란 부용대 아래를 흐르는 깊고 맑은 소를 말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대청을 중요시 하여 대청이 방보다 크다. 또한 자연 경관을 쉽게 보기 위해 문을 달지 않았다.

원지정사 가는 길.

원지정사 가는 길. 예전 풍남초등학교 터 부근에 있다. 소나무 숲인 만송정이 보이는 강가 언덕 위에 있다.

원지정사 입구.

원지정사. 류성룡이 34세 때인 선조6년(1573)에 부친상을 당하여 낙향시 건축하였다. 현재 보이는 건물은 후에 중건하였다. 은퇴 후에도 병이 들어 아팠을때 휴양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곳이다. 강건너 부용대와 옥연정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북향하고 있다. 화천 건너 원지산을 바라 보고 있다고 하여 원지정사라 한다. 서쪽의 누각은 연자루이다. 두 건물 모두 단청을 하지 않았고 나무 기둥은 생긴대로 사용하였다.

북촌댁에서 하회 나루터 가는 길이다. 왼쪽으로 가면 원지정사가 나온다.

하회 나루터 가는 길이다. 강가에 나룻배가 정박해 있다. 옛날에는 낙동강 하류에서 소금배가 올라와 안동시까지 올라 갔다고 한다. 현재는 물이 적어 배가 다니지 않는다. 건너편 해발 64m의 절벽이 부용대이다.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부용은 연꽃을 말한다. 부용대 정상에 서면 S자 모양으로 흐르는 물돌이마을인 하회 마을 전체를 볼 수 있다. 마을 뒤쪽으로 화산이 있어 재래식 다리미 모양처럼 보인다.

마을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로 가는 길은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는 방법과 마을 외부로 나가서 광덕교를 통해 부용대로 갈 수 있다. 동네 주민이 주로 주말만 운영한다. 나룻배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운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룻배 탑승 요금 : 왕복 2,000원.

하회 마을의 양반들은 매년 음력 7월 초순이나 중순에 부용대 아래에 배를 타고 시회를 열면서 불꽃놀이 축제를 하였는데, 이 놀이를 오늘날 하회선유줄불놀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준비에 어려움이 있어 자주 개최되지는 않는다.

부용대와 만송정을 잇는 여러개의 줄을 고정시킨 뒤 뽕나무 숯봉지를 매달아 불을 당기면 일정한 간격으로 불이 붙으면서 소금이 탁탁 튀면서 작은 불꽃들이 터진다. 화천 상류에서는 달걀껍질에 기름을 부어 만든 달걀불을 띄어 내려보낸다. 시 한수가 지어질때 마다 부용대 위에서 불 붙은 솔가지 묶음을 절벽 아래로 던져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광경을 연출한다. 이 때 사람들은 "낙화야"라고 소리친다.

하회 나루터 옆의 만송정 솔숲이다. 만송정 솔숲은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 주고 홍수때 마을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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