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 장군은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룰 때의 명장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군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고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비석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흥덕왕이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고, 이후 김유신 장군 묘는 흥무대왕릉이 되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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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500원

[여는 시간] 09:00~22:00

[닫는 날] 없음

[가는 방법]

버스는 없다.

자전거나 스쿠터를 빌려서 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걸어 간다. 17~20분 정도 걸린다.

김유신 장군(595~673년)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후 신흥 무관 가문으로 떠 올랐지만, 신라에서는 비주류 계층이었다. 진평왕 때 15세의 나이로 화랑이 되었다. 김춘추와 함께 선덕여왕을 보필하였고, 선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무열왕)으로 추대하였다. 무열왕 때 계백장군의 백제군과의 황산벌 전투에서 이겨 백제를 멸망시켰다. 무열왕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인 문무왕은 668년(문무왕 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다. 삼국통일 이후 태대각간에 올랐고, 당나라를 축출하다가 673년(문무왕 13년)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35년(흥덕왕 10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김유신 장군 묘 가는 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서 오른쪽(북쪽)으로 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서쪽으로 보면 서천교가 보인다.

서천교를 건넌다.

서천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면 무열왕릉이 나온다.

이길이 흥무로이다. 김유신 장군 묘로 가는 길은 경주 벚꽃 명소 중 하나이다.

김유신 장군 묘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일방통행이다. 나올 때는 반대편 길로 나와야 한다. 걸어갈 때에는 물론 관계없다. 길 가에 흥무 공원이 있다.

흥무 공원은 일반적인 공원이다. 특기할만한 것이 없다.

김유신 장군 묘 가는 길 푯말.

고개 마루에 주차장과 표파는 곳이 있다.

입장료 500원.

김유신 장군 묘 설명판.

김유신 장군 묘 안내도.

태대각간 비각. 오른쪽 작은 비석에 '삼국통일지 안치소(三國統一誌安置所)'라고 새겨져 있다.

묘로 들어가는 삼문인 흥무문. 삼문은 중앙의 신문(神門, 신이 드나드는 문)과 좌우의 동서 협문(夾門, 夾은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 좌우에서 돕는다는 뜻도 있다)으로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세 문을 모두 열지만, 신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므로, 사람은 협문으로 다니는 것이 법도이다.

김유신 장군 묘. 지름 18m, 밑둘레 50m, 높이 5.3m이다. 호석 바깥에 38개의 돌로 만든 난간을 둘렀다. 가운데의 석상(石床)은 1974년에 복원했다.

왕릉의 석상(또는 상석)을 혼유석(魂遊石)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혼유석은 조선 중기 이후에 등장한 표현이다.

왼쪽의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墓)비. 1710년 경주 부윤이 세웠다. 비문에는 '묘소에 아무런 석물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이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숙종36년(1710년)겨울 부윤 의령 남지훈 지음'이라고 되어 있다.

오른쪽의 개국공순 충장렬 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 비. 1934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비가 오거나 비석이 물에 젖으면 맨 아래 '릉'자가 '묘'자로 변한다. 그래서 꼭 저렇게 물을 부어보는 관광객들이 있다.

12지신 중 용. 경주의 능들 중 8기에 12지신상이 있다. 김유신 장군 묘의 12지신상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작품성이 높다. 7기는 모두 돋을 새김(부조, 浮彫, relief)이나, 성덕왕릉만 둥글 새김(두리 새김, 환조, 丸彫 - 광장 등에 서 있는 동상과 같은 3D 입체 조각)이다.

12지신 중 말. 12지신상들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있으나, 헌덕왕릉과 김유신 장군 묘의 지신상들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다.

숭무전으로 간다. 숭무전 가는 길에 금산교육원과 금산재가 보인다. 금산재는 김해 김씨의 재실로 김유신 장군과 지소부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992년 숭무전을 세워 이제는 기능이 숭무전으로 이전되었다. 금산재 한 쪽에 칼국수를 파는 곳이 있다.

재실이란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무덤이나 사당 옆에 지은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문중의 사람들이 숙식을 하며 제사를 준비하고 회의를 하거나,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 그릇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서쪽에 숭무전이 있다.

숭무전 안내도.

숭무전.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92년에 전각을 세우고, 1993년에 부속 건물을 세웠다.

나가는 길. 아름다운 벚꽃 길이다. 걸어갈 때에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도 된다.

신라의 수많은 왕릉들 가운데 명확히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확실한 것은 무열왕릉과 헌덕왕릉 뿐이라는 주장도 있고, 7개의 왕릉만 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능들은 누구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다만 기록이나 구전에 의해 추정할 뿐이다. 김유신 장군 묘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기록에 없지만, 오랜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이 김유신 장군 묘로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왔었다. 조선시대에 경주 부윤이 장군 묘에 왔다가,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묘 앞에 비석을 세웠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무덤이 김유신 장군 묘로 인정되고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30년에도 경주의 왕릉들이 신라 왕실 가문들의 구전에 기반하여 이름 붙여진 사실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고,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왔다.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금산원(金山原)에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에 있으나 그 '금산원'이 지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 서산 모지사를 동향한 산에 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모지사가 어디있던 절인지도 모른다.

현대에서는 오랫동안 신라 왕릉을 연구해 온 이근직 교수가 이 무덤이 김유신 장군 묘가 아니라는 학설을 주장했다. 무열왕릉이 둘레 돌이나 12지신상이 없는 소박한 왕릉인데 비해 왕의 사후 12년 뒤에 돌아가신 김유신 장군 묘가 너무 화려하다는 점도 의문이며, 분묘 난간 둘레 돌은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이 무덤이 김유신 장군 묘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금산'원'이라면 산이 아니라 평지인 들판에 있다는 뜻이다. 이교수의 주장도 그 논거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될 전망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무덤이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병도 박사는 이 무덤을 45대 신무왕릉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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