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경기전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 태조왕의 초상화(어진)를 모신 집이다. 정문에서 일직선으로 정전이 보인다. 오른쪽 대나무 숲에 전주 사고가 있고, 왼쪽에는 부속 건물들이 있다. 그리고 뒤로 돌아가면 조경묘와 어진 박물관이 있다. 조선 태조 어진은 201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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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 | 어진 박물관

[입장료] 없음

[여는 시간] 3월~10월(하절기) 09:00~18:00 / 11월~2월(동절기) 09:00~17:00

[닫는 날] 없음

1410년(태종 10년) 완산(전주)·계림(경주)·평양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전각을 짓고 이름을 어용전이라 하다가 1412년(태종 12년)에 태조 진전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442년(세종 24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각각 이름을 달리 했다. 임진왜란 때 경기전이 불에 타 1614년(광해군 6년)에 다시 지었고, 1872년 전반적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기전 안내도

경기전 안내도 [크게 보기]

경기전 정문, 경기전 하마비

경기전 정문 앞에 하마비가 있다. 그리고 길 바닥에 전주 읍성의 성곽이 있던 자리의 표시를 해 두었다. 정문 오른쪽에 관광 안내소가 있다.

하마비는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고, 내려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표지이다. 경기전의 하마비는 다른 하마비들과 달리 암수 돌사자 두마리 조각이 받치고 있다.

경기전, 영화 약속, 바람의 화원

영화 '약속'과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 촬영지 안내판이 있다. MBC 드라마 '궁'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경기전 정문

경기전 정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바깥 삼문(외삼문)이 보인다. 가장 안쪽이 초상화(어진)가 있는 정전이다. 왼쪽에 부속 건물들이 있고, 오른쪽에 전주 사고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은 가운데 태극 문양이 있고, 태극 문양 위에 3지창 또는 2지창이 있다. 그 양 옆으로 각각 홀수개의 화살창이 있다. 홍살문이 언제, 무슨 의미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 시대 때에도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홍살문에는 붉은 색을 칠하는데, 이는 악귀를 쫓아내는 의미이다. 한국의 귀신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홍살문에 옷깃이 걸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따라서 홍살문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위해 세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홍살문 안은 신성한 곳으로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인 듯하다. 능묘와 사당을 모신 서원, 향교 등 제사를 지내는 곳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그러다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조선조에는 관청과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는 전각 앞 등에 일반적으로 세우게 되었다.

경기전 외삼문, 바깥 삼문

홍살문을 지나면 바깥 삼문(외삼문)이다. 삼문(三門)은 세개의 문이란 뜻이다. 가운데 정문(正門)이 있고, 좌우에 곁문인 동협문(東夾門)과 서협문(西夾門)이 있다.

삼문은 궁궐과 관청, 절, 서원, 사당 등에 있는데, 궁궐, 관청의 삼문과 절의 삼문, 사당의 삼문은 서로 의미가 다르다.

사당이나 경기전과 같이 제사를 모시는 건물의 삼문은 가운데 문인 정문이 신이 드나드는 문인 신문(神門)으로 평상시에는 닫혀있고, 제사를 지낼 때만 열며, 사람들은 좌, 우의 곁문(협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지금은 오른쪽 통행을 하기 때문에 오른쪽 곁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곁문으로 나오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고 신분에 따라 구분해서 드나들었다. 정문은 당연히 닫혀있어야 하지만, 관광지화되어서 열어두었다.

경기전 안삼문, 내삼문

바깥 삼문을 지나면 안 삼문(내삼문)이 있다. 바깥 삼문과 안 삼문은 둘 다 맞배지붕인데, 바깥 삼문은 주심포 양식이고, 안 삼문은 다포 양식이다.

바깥 삼문.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고, 장식의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안 삼문. 기둥 위의 공포 사이에 또 공포가 있는 다포 양식이다. 다포 양식은 주심포 양식에 비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경기전, 전주 한옥 마을, 경기전 정전

안 삼문을 들어서면 태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신 정전이 있다. 가운데의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인 신도(神道)로 일반인들은 다녀서는 안된다. 초상화가 있는 정전과 직각을 이루는 덧집인 배례청(拜禮廳, 절을 하고 예를 올리는 집)을 위에서 보면 'ㅜ'자형(영어로 T자형, 중국어로 정(丁)자형)이 된다. 이 형태의 집은 왕릉 앞에 흔히 있는데 이를 '정자각(丁字閣)'이라고 한다. 중국 글자로 '정(丁)자형 집'이라는 뜻이다.

정전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이다.

경기전 정전, 풍판, 거북이

정전의 덧집인 배례청의 바람판(풍판, 비바람막이 판)을 보면 가운데 양 쫄대(졸대목) 사이의 방풍널에 거북이 두마리가 있다. 나무집들의 가장 큰 위험은 불이다. 따라서 경기전 정전에 불과 반대되는 물의 상징으로 거북이를 조각했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전주 사고

경기전, 전주 사고

경기전 정문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가면 정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전주 사고이다. 대나무 숲이 있다.

경기전, 전주 사고, 매화나무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에 가려진 뒤에 전주 사고가 있다. 전주 사고 앞 매화 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이다. 왼쪽으로 가면 정전으로 갈 수 있다.

전주 사고, 경기전

전주 사고(全州 史庫)는 조선 왕조 실록을 보관하는 서고이다. 1473년(성종 4년)에 건립되었다. 습기로 인해 책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위해 2층 누각으로 지었고, 창을 열어 수시로 환기를 하고, 3년에 한번씩 포쇄(曝曬, 햇빛과 바람에 말리는 것)하였다. 포쇄를 할 때에도 사관(史官) 1명이 파견되어 규칙에 따라 시행하고, 실록의 내용이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은 조선 첫 임금인 태조부터 25대 왕인 철종 때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실록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편년체인데, 사관이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석하여 주요 내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TV나 영화를 보면 왕이 주위를 물리치고 신하와 독대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왕은 사관(史官)이나 주서(注書-승정원 일기를 기록하는 사람)와 같은 기록자 없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따라서 왕은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다. 태종이 사냥을 가는데 사관이 따라 나서자 '놀러 가는 것이니 따라 올 필요가 없다'고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사관은 왕이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해서 따라 갔다고 한다.

조선 왕조 실록의 특별한 점은 왕뿐만 아니라 누구도 실록 편찬 자료인 사초(史草)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왕이 즉위하면 앞선 왕의 실록을 편찬하고, 편찬이 끝나면 사초는 물에 풀어 없애버렸다.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이를 창피하게 여긴 태종이 사관에게 이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며, 만일 기록하면 너와 네 가족 전부를 사형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사관은 왕이 사초를 볼 수 없기때문에 아무 꺼리낌없이 왕이 협박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사초에 기록해서 태종 실록에 실렸다고 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대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과 충주·성주 사고는 전쟁 중 불에 타버렸다. 그러나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하고 전주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게 이일을 부탁했다.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전주 사고의 참봉인 유신, 오희길 등과 함께 전주 사고의 실록과 기타 책들 64궤짝을 말에 싣고, 정읍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기고 초상화(어진)을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는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 이후 책들과 초상화를 내장산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기고, 안의와 손홍록은 함께 또는 교대로 밤낮으로 이를 지켰다. 감사 김홍무와 승려 희묵이 이끄는 승군 1천여명이 외곽에서 주야로 호위했다. 내장산에서 1년 18일(383일)간 보관하다가 왕명에 따라 정읍 현청으로 옮기고, 조선 정부는 이를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전쟁을 피하다가 다시 부본을 인쇄하기 위해 강화도로 옮겼다. 이 때 실록을 옮긴 사람도 안의, 손홍록이었다. 내장산으로 옮길 때 안의의 나이가 64세, 손홍록의 나이가 56세로, 당시의 나이로 볼 때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 정부는 부족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실록 인쇄에 들어갔다. 각 5부를 인쇄하여 1부는 서울(한양)의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섬과 깊은 산 속에 새로 사고를 지어 보관했다.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 등 4개의 사고이다.

그러나 서울의 춘추관 실록은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다시 불타버려 이후에는 춘추관에 보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묘향산 사고는 북방에 전쟁의 위험이 있게 되자 남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사고를 지어 옮겼다. 이후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의 4대 사고에 보관되어 왔다.

일제 침략기에 오대산 사고의 실록을 토쿄 대학으로 옮겼으나 1923년 칸토 대지진때 대부분 불타 버렸다. 남은 책은 2006년 비로소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현재 조선 왕조 실록은 서울대에 있는 규장각과 국가 기록원 부산 기록 정보 센터에 보관하고 있다.

경기전, 전주 사고

전주 사고 옆에 있는 조선 왕조 실록 보전 기적비.

경기전 조경묘

경기전, 예종 태실

전주 사고에서 나와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가기로 한다. 우선 조선 예종의 태실과 비석이 있다.

조선조에는 왕가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석실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경기전, 조경묘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조선 왕조의 씨족인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이한의 21대 손자이다.

조경묘는 1771년(영조 41년)에 세웠다. 위패의 글씨는 영조의 명으로 세손이었던 정조가 썼다고 한다.

경기전 어진 박물관

전주 경기전, 어진 박물관

조경묘 서쪽에 있는 어진 박물관. 1층에는 태조,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7명의 어진(왕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실이 있다. 1층은 사진 촬영 금지. 지하층에는 역사실과 가마를 모아둔 가마실, 기획전시실이 있다.

어진 박물관은 정재숙 대목장의 설계 및 건축으로 2010년 완공했다.

[입장료] 없음

[여는 시간] 3월~10월(하절기) 09:00~18:00 / 11월~2월(동절기) 09:00~17:00

[닫는 날] 매주 월요일, 1월 1일

경기전 부속채

경기전, 부속채, 부속 건물

경기전 정전 왼쪽(서쪽)에 관리동인 부속 건물들이 있다.

경기전, 부속채, 부속 건물

경기전 부속채 안내도 [크게 보기]

경기전, 부속채, 부속 건물

경기전 부속채. 안에는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각종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와 우물 등이 있고, 관리인들이 근무하는 근무동인 수복청,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의 집무동인 전사청 등이 있다.

경기전 해설 가이드 투어

경기전

오전 11시, 오후 2시, 4시에 해설 가이드 투어가 있다. 무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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