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덕수궁
덕수궁

덕수궁 (경운궁, Deoksugung Palace)

덕수궁(경운궁)은 대한제국의 궁궐이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에는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고 한다. 다른 궁궐과 달리 근대화 정책의 노력으로 1910년 고종 황제의 침전 겸 편전으로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만들었다. 순종이 황제가 된 후 일본은 1920년부터 덕수궁을 매각하거나 철거하여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 되었다. 최근에 덕수궁 장기 복원 계획이 수립되어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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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 덕수궁 미술관(국립 현대 미술관)

[입장료] 1,000원

[여는 시간 (입장 마감 시간)] 09:00~21:00 (20:00)

[닫는 날] 월요일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광해군이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부른 후 300년 동안 경운궁이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은 순종을 즉위 시키고 고종을 경운궁에 억류 시킨 후 덕수궁이라고 불렀다. 덕수궁은 조선 초 정종이 상왕 태조를 위해 지은 궁궐 이름이다. 강제로 퇴위 시킨 후 상왕이 된 고종의 정치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덕수궁의 이름을 다시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크게 보기]

대한문~중화전

대한문은 덕수궁의 동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중화전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다. 동쪽문이었던 대안문 앞으로 도로가 건설되고 도심의 기능이 발달하자 사실상 대안문이 정문 역할을 하게 된다. 1906년 수리를 한 후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1912년 태평로 확장으로 덕수궁 영역이 줄어들게 되면서 덕수궁 담장은 뒤로 물러났으나, 대한문의 위치는 그대로 있었다. 1968년 태평로가 다시 확장되면서 길 중간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1971년 원래 위치에서 33m 뒤로 물러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진다. 2005년 완전 해체후 보수하였다.

대한문 앞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 재현행사를 한다. 왕궁의 수문군이라는 군대는 궁궐 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매일 11:00, 14:00, 15:30에 한다. 11:00 교대 의식 후에는 덕수궁에서 보신각까지 순라 의식를 한다.

대한문을 들어서면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하였다. 다른 궁궐의 다리와 달리 돌조각이나 서수가 없다. 노란 동그라니는 하마비이다. 원래는 궁궐 정문 바깥으로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었다. 궁궐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말과 가마에서 내리라는 표시를 하던 돌이다.

함녕전 입구.

중화문과 행랑이다. 고종이 1902년 중화전을 새로 지을 때 중화전 행각 128칸을 함께 만들었다. 고종이 죽은 후 행각들은 일본에 의해 대부분 헐리게 되었다.

중화문이다. 중화문과 중화전은 남향이다. 중화문 남쪽에 인화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덕수궁 담장으로 막혀있다.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이다. 정전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과의 조회, 외국 사신의 접대 등 국가적 공식 행사를 하는 곳이다. 1902년 2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대화재가 있은 후에, 재정적인 궁핍과 정치사정으로 1906년 단층으로 축소되어 만들게 되었다.

중화전으로 올라가는 2층 월대의 계단이다. 계단 답도에 용 두마리가 새겨져 있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대한 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그렸다.

정은 세 발모양의 향로로 청동으로 만들었다. 중화전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 왕이 어좌에 오르면 청동 향로에 향을 피웠다. 중화전의 창호는 황색으로 황제를 뜻한다. 창덕궁의 인정전도 황색 창호이다.

2010년 궁궐 유물 실사 과정에서 덕수궁의 정 뚜껑을 찾았다. 대형 향로는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법궁인 덕수궁 중화전에 좌우 양쪽에 한 개씩 있었다. 근정전과 중화전의 향로는 모양이나 형식이 서로 비슷하다. 예전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향로 뚜껑을 이번 실사에서 찾은 것이다.

중화전의 어좌와 보개.

중화전 천장의 용조각. 궁궐 정전 천장에서 용조각를 볼 수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은 용의 발가락이 7개(칠조룡)이고, 덕수궁 중화전은 5개(오조룡)이다.

즉조당~석조전

오른쪽이 즉조당이고, 왼쪽이 준명당이다. 고종은 즉조당을 1902년 중화전이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하고, 준명당을 업무 집행실인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두 건물을 복도(2간의 행각)로 연결하였다.

즉조당은 조왜7년전쟁(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에서 돌아 온 후 임시로 머물던 곳으로, 인조 때 즉조당이라고 하였다. 그 후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 온 후에는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화재로 불타 없어 졌다. 1906년 중화전이 창건 한 후부터 즉조당이라 다시 이름지었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남아 있는 유일한 2층 목조 건물이다.

유현문. 석어당과 덕홍전 사이에 있다. 전서체로 유현문을 새기고, 그 양 옆에 학문양을 새겨져 있다. 유현문 반대쪽에는 용 문양을 새겼다.

정관헌. 고종이 휴식, 연회장으로 활용했던 곳이다. 왕의 침전인 함녕전 뒤에 있다. 전통 궁궐의 후원 정자 기능을했다고 볼 수 있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했다. 우리 전통 양식과 서양 건축 양식이 결합하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을 안쪽에 세우고, 동,서,남쪽으로 난간을 만들었다. 지붕 형태는 팔작 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관헌의 기둥을 보면 용 문양과 박쥐, 꽃병 등이 새겨져 있다.

광명문.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10년 건설한 서양식 건물이다. 근대화 정책 중 하나였다.

석조전은 영국 사람 브라운이 발의하고, 하딩이 설계하였다. 1905년 메가다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 되면서 일본 오쿠라 토목회사가 시공을 하게되었다. 1938년에는 석조전 앞으로 분수가 있는 서양식 정원을 만들었다.

덕수궁 미술관

덕수궁 미술관.

[입장료] 전시회마다 다르다. 국립 현대 미술관 홈페이지 참조

[여는 시간 (입장 마감 시간)] 화~목 》09:00~19:00 (18:00) / 금~일 》09:00~20:30 (19:30)

[닫는 날]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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