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화성

수원 화성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힌다. 성의 방어 기능 뿐만 아니라 각각의 건축물의 아름다움도 추구한 성으로 1997년에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7km이다. 성 안에는 정조가 화성으로 올 때 머무는 행궁인 화성 행궁이 있다.

화성은 동쪽은 평지이고,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평지와 산에 걸쳐 축조한 독특한 형태의 평산성이다. 수원역에서 약 2km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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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1,000원 / 유료 관람 시간 외에는 무료 / 입장료는 성곽 길 도중에서 받는다.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유료 관람 시간] 3월~10월 》09:00~18:00 / 11월~2월 》09:00~17:00

[닫는 날] 없음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건설한 계획 도시이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에 갈 때 머무를 거처를 위해 화성을 지었는데,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상공업을 진흥하며,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789년 주민 이주와 관청 설립등 신도시 정비가 끝나자 1794년 1월 성곽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성 안에는 48개 시설물이 있었으나, 전쟁을 겪고, 일반 건축물들이 들어서서 현재는 41개 시설물이 있다. 동서양의 축성술의 장점을 모아 만들었다. 성곽의 축조에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하였고, 조왜 7년 전쟁(임진왜란)을 계기로 총포도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든 근대적 성곽이다. 재료를 규격화하여 건축 효율을 높이고,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의 장치를 사용하여 큰 돌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조왜 7년 전쟁(임진왜란)과 2차 조청 전쟁(병자호란)을 치른 뒤, 조선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성곽 방어 능력을 향상할 필요성을 느꼈다. 유성룡은 조왜 7년 전쟁(임진왜란)후 징비록에서 치성과 옹성, 포루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영·정조 때에는 농상공업이 발달하던 시기였으므로, 전시에 읍성에서 나와서 산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치르기에는 경제적 손실이 너무 컸다. 그래서 산성과 읍성의 전통적 2원 체제보다는 읍성의 자체 방어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둘 필요가 생겼다. 1790년 강유는 수원에 성쌓기를 건의하였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 축성 계획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화성은 성 안에 도시가 형성되고, 주변 저수지 축조와 둔전 등의 농업 기반 시설이 갖추어진 자체 방어력이 있는 계획 도시로 조성하게 된다.

수원 화성의 대표적 관광지 지도이다

수원 화성 지도이다. 화성 관람은 팔달문, 화성행궁, 장안문, 연무대등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괜찮다.

팔달문에서 화양루까지

수원 팔달문에서 화양루까지의 경로를 나타낸 지도

수원 관광 안내소에서 주는 안내 지도들은 팔달문을 기준으로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 연무대쪽으로 즉 시계방향 순서로 성곽 시설물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팔달문에서 시작하도록 한다.

팔달문이다. 화성의 남쪽 문이다.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이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 완공하였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에 성벽을 벽돌로 둥글게 한 겹 더 쌓아서 옹성을 만들었다. 옹성이란 이름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옹성 방식이 널리 쓰였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동대문 이외에는 없었다. 그 위에 각종 대포와 화기를 설치하였다. 옹성문 위에 오성지라는 5개의 구멍을 만들었다. 적이 성문에 불을 질러 파괴하려 할 때에 구멍으로 물을 내려 보내 문을 보호 하였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가마가 드나들 수 있도록 넓게 만들었다.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화성은 당시 우리나라 성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벽돌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실학자들의 벽돌 사용 제안과 강화 외성 벽돌 개축 실험으로 벽돌의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성벽 전체가 벽돌로 된 것은 아니다. 성벽 대부분은 돌로 만들고 벽돌은 주로 암문 등 작은 원형이나 복잡한 곡선형의 시설물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돌보다 작은 벽돌은 형태를 자유스럽게 만드는데 유리하였으며, 돌로만 쌓은 석성은 포의 공격에 무너지기 쉽지만, 벽돌로 쌓은 성은 견고히 버틸 수 있었다.

팔달문 뒷편. 화성의 문루는 사면에 판문을 대고, 문에 짐승이나 태극 무늬를 그려 넣었다.

팔달문 왼편에 수원역쪽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그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안으로 들어가면 관광 안내소가 보인다.

(진행 경로에서 반대로 바라본 모습) 팔달문 관광 안내소에서 바라본 팔달문이다. 녹색 화살표인 왼쪽 길로 가면 화성 행궁이 나온다.

팔달문 관광 안내소를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관광 안내소에서 주는 화성 그림 지도는 화성을 관광하기에 편리하게 제작되었다. 꼭 받아서 올라간다.

남포루로 올라 가는 길 중간에 굴다리가 있다. 왼쪽으로 내려 가면 수원향교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화성열차 승차장이 나온다.

남포루. 포루(砲樓)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치성이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성곽 시설물 중에서 화포를 성벽 안에 감추어 두고 위,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도록 포루가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었다. 성벽 아랫부분까지 구조물이 설치되었으나 성안에서는 외관상 단층 누각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포루는 벽돌을 이용하여 내부를 3층으로 만들었다. 성 밖으로 약 8.8m 돌출 되어 있다.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 용도를 수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포루(砲樓)와 포루(鋪樓)는 외관상 비슷하지만, 기능과 형태가 구분된다. 포루(砲樓)는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고, 포루(鋪樓)는 군사 초소이다. 포루(砲樓)는 강력한 화력기지로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축대와 여장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여장을 높게 쌓았다. 높은 여장으로 누각의 벽체가 가려지고, 지붕만 보인다. 바깥에서 보면 외형이 매우 견고하게 보인다.

서남암문이다. 암문 밖으로는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밖으로 나와서 본 서남암문. 암문은 성곽의 비밀통로이다. 서남암문은 적 몰래 양식이나 무기, 물자 등을 들여오거나 사람들이 은밀히 서남각루로 오가는데 사용하였다. 그래서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필이 지나 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문 위는 보통의 성곽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팔달산 서쪽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다른 암문과 달리 포사라고 부르는 일종의 망루를 세웠다. 포사 안에는 온돌방이 있고, 사면에 판자문을 대고 짐승 얼굴을 그려 넣었다. 서남암문의 홍예 높이는 약 2.7m, 너비는 약 2m정도이다.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통로. 용도라고 한다. 서남각루는 약 170m 정도 떨어져 있다.

서남각루(화양루).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곳 중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서 성곽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이다.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남각루는 외성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팔달산 높은 지점에 있어서 전망이 좋고 전략적 요충지이었다.

서남 암문에서 화서문까지

서남 암문에서 화서문까지 가는 경로를 그린 지도

서남 암문에서 화서문까지 가는 경로를 그린 지도이다.

서포루. 포루(鋪樓)는 성의 치성 위에 지은 누각이다. 성내에서 이동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병사들이 주둔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밤에 지나 다니는 사람들을 통행 금지시키고 순찰을 돌던 군졸이 머무르던 곳이다. 서포루는 서장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 밖으로 약 7m 돌출되었다. 누각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전안을 두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 받는 것에 대비하여 설치하였다.

서포루 맞은편에 효원의 종과 매표소가 있다. 수원시에서는 수원시의 이미지를 효의 도시로 상징화 시키고 관광객이 스스로 타종하면서 부모와 가족, 개인의 소원을 빌수 있도록 종각을 개방하였다.

[요금] 1,000원(1회 3번 칠 수 있다)

[여는 시간] 3월~10월 》09:00~18:00. 11월~2월 》09:00~17:00

[닫는 날] 없음

매표소. 화성 관람 매표소는 이곳 외에도 장안문, 연무대, 창룡문 부근에도 있다. 각 매표소 부근에서는 표 검사를 하므로, 구입한 표를 버리지 말고 잘 간직한다.

[입장료] 1,000원. * 유료관람시간외 무료

[유료 관람 시간] 3월~10월 》09:00~18:00. 11월~2월 》09:00~17:00

[닫는 날] 없음

매표소 뒤쪽으로 서장대와 서암문이 보인다.

서암문. 서장대 남쪽 약 50m에 있다. 암문은 전시에 성이 포위당했을 때 외부와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사용할 수 있는 문이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성문과는 달리 성문 위에 누각이 없는 것이 보통이며, 외관상 눈에 잘 띄지 않게 설치한다. 서암문은 성문이 바깥쪽으로 향하지 않고 북쪽을 향해 옆으로 틀어져 있다. 서암문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암문 가까이에 접근하기 전에는 문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다.

화성에는 총 5개의 암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4개의 암문이 남아있다. 산성이 아닌 읍성이나 평지성에 암문이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화성의 암문도 평지가 아닌 산이나 구릉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각기 지형에 따라 조금씩 모습과 기능이 다르다. 서암문의 경우는 전형적인 암문이다. 하지만, 북암문이나 동암문의 경우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밖에서 쉽게 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전시에 비밀통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화성은 수도 한양성과는 달리 별도의 작은문이 없기 때문에 암문 일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서남암문의 경우도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외곽으로 연결되는 문이 아니라 서남각루(화양루)로 이어지는 성 내부 길목에 위치한 문이다.

앞쪽이 서장대, 뒤쪽이 서노대이다. 장대는 주변의 사방을 내려다 보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화성은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길기 때문에 서쪽과 동쪽에 각각 서장대와 동장대를 세웠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다. 화성장대란 편액은 정조가 쓴 것이다.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 본부이다. 정조는 1795년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노대는 다연발 활인 쇠뇌(석궁과 비슷)를 쏠 수 있도록 벽돌과 화강석을 이용하여 높게 쌓아 근접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으며 누각이 없다. 높이가 높아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할 수 있어서 성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기도 하였다. 서노대와 동북노대 2곳이 있다. 서노대는 서장대 옆에 정팔각형으로 약 3m의 높이로 벽돌로 여장을 쌓아 만들었다.

서노대에 오르면 사방이 보인다. 적으로부터 군사 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서일치. 치(치성)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의 요소 요소에 성벽을 바깥으로 튀어나도록 하여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삼국시대 고구려나 신라의 성에서 치가 존재했을 정도로 고전적인 성곽 구조물이다. 치는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화성에는 10곳이 있다. 기본적으로 치성 위에는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경사진 지형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바깥쪽은 수직의 성벽을 돌로 쌓고, 안쪽은 흙을 쌓아 올려 공격과 감시가 수월하도록 하였다. 이런 방식을 내탁이라고 한다. 중국과 같이 평지에 성 안팎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 방식과는 다르다.

성 밖에서 바라본 서일치. 치성의 높이는 성벽과 같고 길이는 대체로 9.3m쯤 되며 바깥쪽으로는 현안 1개를 설치하여 적의 접근에 대비하였다. 화성의 성벽은 높이를 3등분하여 밑의 3분의 2는 큰 돌을 쓰면서 점점 안으로 들여 쌓고 윗부분 3분의 1은 작은 돌을 사용하여 점점 밖으로 내어 쌓았다. 이를 들여쌓기 또는 규형이라고 한다. 밑부분에서는 안쪽으로 들어쌓아 성이 잘 무너지지 않게 하였고 윗부분에서는 내쌓아 적이 쉽게 넘을 수 없게 하고자 한 것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네모난 긴 돌을 세로로 눕혀 서로 이가 맞물리도록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4~6m 정도이고, 그 위에 1~1.2m의 여장을 쌓았다.

조선 태조 때에는 장방형의 작을 돌을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쌓았다. 성을 쌓기는 편리하나 돌이 빠져 나오는 단점이 있었다. 숙종 때에는 정방형으로 다듬어 벽돌 쌓듯이 빈틈없이 돌과 돌의 이가 물리도록 쌓았다. 화성의 들여쌓기는 성벽을 일자로 쌓았을 때 무너지기 쉬운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에서는 함경도 경성 읍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들여쌓기 방식으로 성을 만들었다.

서북각루. 각루는 성곽의 돌출된 군사적 요충지 중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서 성곽 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4개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의 북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원래 각루는 성의 네 모서리에 위치한 구조물이다. 중국에서는 성곽을 만들면 사각형의 네 모서리에 각루를 만든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연 지형을 살려서 곡선 형태로 성벽을 배치한다. 화성의 경우도 팔달산과 동쪽 구릉을 따라 만든 곡선형이기 때문에 모서리가 없다. 화성의 각루는 목조 건물에 나무벽이 없고 기둥만 있는 단순한 누각 형태인 점에서 포루와 다르지만, 둘 다 사용하는 용도는 비슷하다. 화성의 각루는 순수한 군사용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전망대에 가까운 시설이며, 특히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은 아름다운 정자로 유명하다.

서북각루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화서문, 서북공심돈에서 멀리 장안문까지 보인다. 성벽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고 높이도 다르다.

서북각루 누각 아래 1층은 온돌방을 만들었다. 숙직하는 군사가 사용하도록 하였다.

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

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 가는 경로를 그린 지도

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 가는 경로를 그린 지도이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 문이다.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달리 화서문은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 한쪽이 열린 모양으로 되어 있다. 석축으로 된 무지개 문위에 단층 문루가 있다. 사방은 낮은 담인 여장으로 둘러졌다.

성벽위에 덧쌓아 화살의 방패 역할을 한 낮은 담을 여장(성가퀴)이라고 한다. 사람의 머리 높이와 여러 명이 움직이는 것을 감안하여 높이 1.2m, 4m 간격으로 만들었다. 또한 화살을 쏠 수 있는 3개의 총안 구멍을 만들었다. 여장위에는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해 용마루 형태의 옥개석을 덮었다.

서북공심돈.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일종의 망루이다. 벽돌로 벽체를 4각으로 쌓고 3층에는 단층 망루를 세우고, 4면에 판문을 설치하였다.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내부는 3층으로 층과 층사이는 마루판을 여닫도록 하는 문을 만들어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고 중앙부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다. 속이 빈 돈대로는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이 최초이다. 돈대 외벽에는 많은 구멍을 뚫어 바깥의 동정을 살필 수도 있고 백자총, 불랑기를 발사하여 적에게 어느 곳에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도록 하였다.

공심돈은 포루(砲樓)와 비슷하게 벽돌로 된 구조물로 안이 비어 있어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포루와 다르게, 공심돈은 전체 높이가 성곽 높이보다 월등하게 높은 것이 특징이다. 현재 화성에는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만 남아 있으며, 남공심돈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후 아직도 복원이 되지 못했다. 서북공심돈은 여러 층의 나무 바닥을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릴 때는 사다리를 이용했다. 이에 반해 동북공심돈은 돌로 된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었다. 서북공심돈은 성벽 밖으로 돌출되어 있지만,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에 설치되어 있다.

북포루. 북포루(鋪樓)는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있다. 내면에는 나무 사다리를 설치, 누각에 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에는 귀면의 검정색 코 부분에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 북서포루(砲樓)는 성 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다. 지붕의 형태가 성 안쪽은 맞배 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되어 있다. 포혈(열쇠모양)의 구멍을 좁게 만들어 밖에서는 안으로 공격할 수 없게 만들고 안에서는 밖으로 포나 총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북서적대. 장안문의 서쪽에 있어 북서적대라고 한다. 성문 옆에는 성벽보다 돌출된 적대가 있어 성문을 방어할 수 있게 했다. 성문의 좌우에 일정 간격을 두고 성벽보다 높은 대를 마련하여 창이나 활, 화살 등을 비치하였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하였다. 적대는 우리나라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보통 성곽보다 높게 만드나 북서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다. 밖으로 3개의 현안을 뚫고 벽돌로 쌓은 담장마다 총구멍을 만들었다. 현안이란 성위에서 성 밑까지 좁고 경사지게 길게 내리 뚫어 놓은 구멍이다. 이 구멍을 통해 성밑을 살피거나 접근하는 적에게 끓인 물이나 기름을 부어 공격한다. 현안은 성벽, 치성, 여장(성가퀴)에 다수 설치하였다.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팔달문의 경우 좌우의 성벽과 적대는 현재 도로로 사용되고 있어 복원하지 못했다. 정약용은 화서문 좌우에도 적대를 설치할 것을 제안 했으나 화서문은 왼쪽에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오른쪽은 공심돈이 있어 적대를 세우지 않았다.

북서적대에서 바라본 장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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