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포석정
포석정

포석정

포석정은 여러 건물들이 있던 어떤 시설이었는데,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화강암으로 만든 물길만 남아 있다. 물길 모양이 전복을 닮았다고 해서 포(鮑, 전복)석정(石亭)이라고 한다. 물길에 술 잔을 띄우면 벽에 부딪히지 않고 흘러간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적 1호이다. 신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왕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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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500원

[여는 시간] 3월~10월 》09:00~18:00 / 11월~2월 》09:00~17:00

[닫는 날] 없음

[가는 방법]

500번 버스 : 포석정 입구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시외 버스 터미널 앞(고속 버스 터미널 맞은편이 아니다), 경주역에서 탄다. 25~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다. 505, 506, 507, 508번 버스도 가지만, 하루에 7~8회 배차하고 있다.

자전거나 스쿠터를 빌려서 간다.

오릉 입구에서 약 2km정도 이다.

오릉을 지나서 남쪽으로 가면 포석정이 나온다. 고속버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오릉까지 가는 길은 [오릉] 페이지를 참조할 것.

포석정 입구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길을 건너 포석정으로 들어간다. 길 오른쪽 안내판은 나무에 가려져 있고, 왼쪽 입구에는 안내판이 없다.

길 오른쪽 포석정 안내판.

입구에는 지마 왕릉 표지 돌이 서 있고, 포석정 안내 표지는 없다. 왼쪽만 보고 가다가는 입구를 놓칠 수 있다. 이 길로 간다. 조금만 가면 포석정이 나온다.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입구 정면은 주차장이 가로막고 있다. 주차장 뒷편이 포석정이다.

포석정 조감도.

포석정 입구.

입장료 500원.

포석정.

수백년된 나무의 뿌리 때문에 땅이 약간 들려 위로 솟았다. 따라서 지금 이 상태로는 물을 흘려도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나무를 뽑자는 견해도 있었으나 아직 결정을 못내리고 지켜보고 있다.

안에서 입구쪽으로 본 포석정.

이런 형태의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4세기에 중국 동진의 왕희지가 난정(蘭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난정은 포석정과 달리 자연석을 이용해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에도 몇 개의 유상곡수 형태들이 있다. 가고시마의 센간엔(仙巖園) 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유상곡수 터가 남아있는데, 매년 3월 첫째 일요일에 유상곡수의 연회를 연다고 한다.

포석정은 길이 10.3m, 폭 7m 정도이고, 물길 길이는 약 22m이다. 다양한 크기로 다듬은 돌 63개를 사용했다. 물길의 폭은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30cm 정도이고, 깊이도 평균적으로 22cm 정도이다. 물길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cm 정도이다.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물길은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연회를 여는데 사용되었다. 포석정은 규모가 작아서 물이 그대로 흘러나가면 2~3분만에 다 빠져나가므로 4언시나 5언시를 짓는데 최소한 10분 정도가 필요하다고 볼 때 시 한 편을 짓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따라서 신라의 기술자들은 포석정의 물이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술잔이 물길을 돌 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여 시간을 지체하도록 아주 주의 깊게 물길의 폭과 깊이, 모양을 설계하였다. 이러한 공법은 절대로 우연히 이루어 질 수는 없는 것으로, 신라시대의 높은 기술수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국과학기술원 장근식 교수는 모형에 의한 실험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아주대학교 유동훈교수는 모형 실험을 통하여 포석정의 물길의 구조와 원리들을 검증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유상곡수의 물길들은 맴돌아 나가는 것이 없이 바로 빠져 나가므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 규모를 포석정보다 크게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열고 있던 도중 후백제의 왕 견훤의 군대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遊鮑石亭宴娛)라는 문장 중 유(遊)는 놀았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공자님이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했다고 할 때, 천하를 놀러 다녔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간다'라는 뜻이다. 문제는 유(遊)자가 아니라 연(宴)자이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고려사람으로 적국이었던 신라를 조롱하는 뜻으로 낮춰 적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전쟁 중에, 적군이 불과 25km 떨어진 고울부(지금의 영천)까지 진격하고 있고, 경애왕이 다급하게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긴급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놀러 갔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또 견훤이 습격한 때가 음력 11월 즉, 한겨울이었으므로 물이 얼어 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에 유상곡수의 연회를 열었다는 김부식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 신라시대에 왕이 연회를 연 곳은 포석정이 아니라 임해전과 안압지이다. 안압지의 발굴 결과 각종 연회에 쓰인 물건들도 발굴되었다.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의하면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다고 한다. 이 춤이 어무 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 상심무(御舞祥審舞)라는 춤이다. 신하들에게는 이 신이 보이지 않았고, 왕에게만 신이 보였다고 한다. 즉, 오직 왕만이 신과 교류할 수 있다는 왕의 절대 권위를 의미한다. 이 기록에서 포석정이 통일신라 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포석정이 신이 내려온 곳이라는 것이다. 즉, 포석정은 신성한 지역이다. 포석정은 남산 기슭에 있고, 남산은 경주의 신성한 산이다.

포석정 터에는 1999년 일부 시험 발굴시 '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 되었고 건물의 흔적들도 발견되었다. 전체 발굴 계획은 아직 없지만, 포석정 터 전체에 건물들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포석정이 어떤 규모였으며, 어떤 목적의 건물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원래 신성한 곳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헌강왕 이후 신성한 곳이 되었을 것이고, 경애왕은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때에 이 신성한 지역에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견훤의 급습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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